브랜드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

큐레이션

나의 모든 걸 바꿔놓은 우리집일과 주거의 공간을 한 건물에 집어넣은 집

공간의 지배력은 의외로 강력하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안락함, 무대 위 공연의 막이 열리면 순식간에 몰입되는 경험만 봐도 그렇다. 코로나19 시대에 리모트워크가 일상화되는 분위기지만, 그곳이 어디든 업무에 집중하기 좋은 공간이 필요하다.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은 일과 주거의 공간을 한 건물에 집어넣은 집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집이라는 뜻을 담아 ‘아우어하우스Hour House’라고 이름 붙였다.

#PEOPLE
일러스트레이터 vs 그림 그리는 사람

일러스트레이션은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이나 사진, 도표 등 시각적 요소로 표현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리고 일러스트레이션을 만드는 사람을 일러스트레이터라 한다. 신문, 잡지, 단행본, 그림책 등 출판물뿐 아니라 공연, 홍보 포스터, 광고 등 다양한 영역에 일러스트레이터가 활동하고 있다. 김상인 작가 역시 10년 넘게 다양한 분야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약 중이다.

일러스트레이터 김상인 작가.

“직업은 일러스트레이터예요. 일러스트레이션은 그림 자체만으로 존재하기는 어렵고, 텍스트를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20대 중후반부터 15년 가까이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으로 먹고 살아요.”
잡지나 단행본 삽화, 그림책, 광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 중인 작가는 최근 방송 다큐멘터리를 위한 작업을 많이 한다.
“다큐멘터리에는 전문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영상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내레이션을 받고 PD의 기획 의도를 받아서,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아트워크를 잡고, 거기에 움직임을 넣는 거예요. 예를 들어 ‘코로나19 이후의 시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돈의 흐름’ 같이 추상적인 내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건데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무척 재미있어요. 일러스트레이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작업이라서 좋아합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주로 하는 1층 작업실 내부.

처음부터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회화를 전공하고 순수 작가의 길을 꿈꿨다. 하지만 막상 화가로서 사회에 진출하려고 보니 어렵게 느껴졌다.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나름의 기준에 스스로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평가나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거나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꾸준히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림은 계속 그렸지만, 10년 넘도록 의뢰 받은 그림들만 그렸던 거예요. 그런데 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사무실에서 퇴근하면 집에서 페인팅을 했어요. 39살에 처음 개인전을 열었어요. 그리고 페인팅을 위한 작업실의 필요성을 느꼈죠.”

드로잉, 커머셜 작품들을 전시한 작업실 공간.

#SKILL
Keep 김상인 Weird

홍제동 주택가에 자리한 아우어하우스는 1층 작업실과 2, 3층 주거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업실은 카페로도 운영하는 덕분에 이곳을 찾는 이는 작가의 취향이 듬뿍 담긴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시선 닿는 곳마다 작가의 손길이 닿아 있다. 곳곳에 걸린 작품,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디오, 커피를 내주는 법랑 컵, 끄적거린 낙서들까지. 커피, 음악, 가구, 그림, 라이프스타일 등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그것을 보고 느끼는 대중의 솔직한 감정을 교류하기 원한다.
“작업실에 카페를 겸하는 게 작업에 도움은 안 되지만, 관계를 맺는 매개체 역할을 해줘요. ‘커피 한 잔 하세요’라는 말로 나의 그림을 보여줄 수 있어요. 취향이 묻어있는 공간에서 작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고요. 앞으로 이 공간이 어떻게 쓰일지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실험을 하고 있는 거죠.”

카페를 겸한 작업실 내부. 작가의 취향과 작업을 온전히 드러낸다.

작업실 겸 카페에는 ‘KEEP 391 Weird’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의 첫번째 개인전 제목이기도 하다. ‘Keep Weird’는 미국 포틀랜드의 슬로건 ‘Keep Portland Weird’에서 온 것이다. 포틀랜드는 <킨포크>의 고향이자 힙스터의 도시다. 소규모 공동체가 잘 이루어져 있고, 예술가들도 많다. 특유의 여유로움과 감성을 가진 도시를 여행하면서 ‘조금 달라도 이상할 것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Keep’과 ‘Weird’ 사이에 어떤 목적어라도 넣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391>이라고 쓴 잡지가 있는데 그 숫자의 배열이 마음에 들었고, 서른아홉에 첫 번째 전시를 해서 ‘Keep 391 Weird’ 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했습니다.

포틀랜드 여행 중 만난 노숙인이 자유로운 사람으로 느껴져서 작가가 좋아하는 신발을 신기고, 타투를 새기고, 책과 강아지까지 그려 넣은 작품<홈리스>.

직접 만든 가구로 꾸민 작업 공간. 벽면 왼쪽 그림은 슬픈 서커스를 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지만, 불구덩이를 넘어 살아남았음을 표현한 <생존>.

가운데 그림은 포틀랜드 여행을 다녀와서 기쁜 마음으로 춤추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 <댄스>.

커피를 마시며 작가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법랑 컵들.

작가는 늘 ‘다름’을 추구한다. 괴짜 같거나 지나치게 진지해서 대중과 동떨어진 건 아니지만 반 발짝 정도 떨어진 느낌이랄까. 디지털 작업이 일반적인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에 일부러 수작업을 넣는다. 카페에서 서빙하는 컵은 자신이 좋아하는 법랑 컵을 선택하고, 테이크아웃 컵에는 그림을 그려준다.
“‘굳이’, ‘왜’ 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남들과 다르려면 다르게 행동해야 하잖아요. 만들어진 것, 만들어낸 것보다 조금 개인화된 느낌을 더하는 거예요.”

#SPACE
Home, sweet home

런던에서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 회고전>을 보기 위해 여행을 다녀오면서, 그 무렵부터 개인 작업을 시작했다. 사무실이 있었지만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하는 공간이었다. 페인팅을 할 공간이 없으니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뭐든 그렸어요. 예정되어 있던 포틀랜드 여행 중에 전시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곳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한 작품들로 첫번째 개인전을 열 수 있었어요.”

오디오를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이 듬뿍 담긴 공간.

2018년도 서촌 온그라운드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은 인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다. 아우어하우스를 짓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서촌에서 보낸 시간들이 밑바탕이 되었다.
“페인팅 작업실이 없으니까 주로 집에서 작업을 했는데요. 전시를 준비할 때 3~4주 정도 갤러리에서 작업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좋은 기회로 1개월 정도 서촌에서 살면서 작업까지 해본 거예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으니 페인팅을 할 수 있는 작업실이 필요했고, 동네 분위기가 너무 좋았던 서촌에 주거 공간까지 겸한 집을 알아봤다. 적당한 집을 찾아다니다 홍제동 주택가에 땅을 찾게 됐고, 그해 말부터 1년 반 정도 집을 지었다.
“집과 사무실을 분리해서 써봤는데 10년 넘게 낸 월세 생각을 하니까 차라리 짓는 게 낫겠더라고요.”

아우어하우스 외관.

집을 짓기 적합한 땅을 찾고, 설계를 하고, 시공하는 과정은 선택의 연속이다. 오죽하면 집을 짓다가 10년은 늙는다는 말을 하겠는가. 그는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결정하고 나서, 그걸 기준으로 나머지 공간을 배치하고 살을 붙였다. ‘1층은 작업실, 2층은 주거 공간으로 쓴다’, ‘2층에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하얀 캔버스를 채워서 그림을 만드는 것과 똑같더라고요.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 하고, 온전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였죠.”

빛을 담아내는 김상인 작가의 아우어하우스.

김상인 작가에게 집은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 패턴이었고, 운동이라는 건 마음의 짐 같은 것이었다. 아우어하우스에서는 아침에 눈을 번쩍 뜬다. 3층 침실 위의 천창으로 햇볕이 쏟아져서 늦잠을 잘 수가 없다. 일찍 일어나면 걸어 나가서 안산 정상까지 1시간이면 올라가고, 조금 걷고 싶으면 홍제천을 산책한다.
“산을 정말 싫어했는데, 스스로 산에 오른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긍정적인 변화죠. 덩달아 식단 조절도 하고 건강한 라이프스타일로 변하고 있어요. 집에 햇볕이 잘 들어서 그런지 마음도 조금은 밝아지는 것 같고요. 4계절을 온전히 지내고 보니 이 집이 제 인생을 완전 바꿔놓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작가는 집을 짓고 살며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사실 지난해에는 코로나의 여파로 4~5개월 동안 일이 없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기 시작한 이후 처음 겪는 경제적 타격이었지만 큰 걱정 없이 지냈다. 시간의 여유가 생겨서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재미있게 공간을 꾸몄다고 생각했다. 일상 탈출을 위한 호텔 여행보다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더 좋았다.
“집을 짓는 경험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다 잊어버렸어요. 좋은 기억이었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프로젝트였던 것 같아요. 긍정적인 게 너무 많아서 그걸로 충분해요. 건강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여유를 갖게 됐고요. 이제 작업도 꾸준히 하려고요. 누군가 나의 그림을 볼 때 ‘너와 비슷해’, ‘네 그림 같아’라고 할 때 가장 좋아요. 저를 그대로 보여주는 작업을 하고 싶은데, 억지로 만들 수는 없잖아요. 집을 통한 저의 변화가 작품에 자연스럽게 베어 나오면 좋겠어요.”
공간의 변화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확실히 바꾸어놓았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시작하지 못했지만, 공간의 변화가 작품세계를 어떻게 바꿔 놓을지 무척 기대된다.

집을 짓는 경험이 작가의 작품세계에 가져올 변화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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